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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미륵의 어린 시절은 평온했다. 반년 터울의 사촌 형 수암과 함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고, 쉬는 시간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거나 제기도 차고 싸움박질도 벌였다. 나이가 조금 더 들자 신식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학문도 익혔다. 조상들이 그러했듯, 현명하고 지혜롭게 새 시대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어긋났다. 거리에는 일본군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임금이 물러난 뒤 나라는 일본에 합병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잠시 방황한 끝에 미륵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1일을 맞는다. 봉기에 가담했던 미륵은 군경의 단속을 피해 낙향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압록강을 넘어 상해를 거쳐 유럽을 향한다.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걸작이자 1946년 독일 문단이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작품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국내에서도 전혜린의 첫 번역 이후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다. 일제와 나치 독일이라는 두 제국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저자의 손에서 탄생한, 상실된 고향과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이라는 주제는 한 민족의 특수한 경험을 넘어 인간 보편에 가닿는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경계에서 탄생한, 이방의 언어로 벼려 문학사에 흔적을 남긴 인류의 유산.